잘 가거라, 이 가을날
우리에게 더 이상 잃어버릴 게 무어람
아무것도 있고 아무것도 없다.
가진 것 다 버리고 집 떠나
고승이 되었다가
고승마저 버린 사람도 있느니
가을 꽃 소슬히 땅에 떨어지는
쓸쓸한 사랑쯤은 아무것도 아니다
이른 봄 파릇한 새 옷
하루하루 황금 옷으로 만들었다가
그조차도 훌훌 벗어버리고
초목들도 해탈을 하는
이 숭고한 가을날
잘 가거라, 나 떠나고
빈 들에 선 너는
그대로 한 그루 고승이구나
문정희 시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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